박홍진

박홍진

OTR대표, 극단 연희광대 대표, 전)우리연극 발행인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극장치에 대한 연구 그 첫 번째 글로써, 연극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위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연극 소유 형식에 관한 기본 개념의 정립으로부터 출발할까 한다. 이러한 개념 정립으로부터 시작하여 차후에는 구체적 방법론의 문제로까지 논의를 진전 시켜 나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연극 소유 형식에 관한 한 많은 사유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사유의 오류를 생성, 발전시켜 상식화 해버린 주변 환경의 제고를 통해 올바른 연극 인식의 전환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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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것’이란 ‘내 것, 네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것’이란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다. 함께 나누는 것이다. 연극에 있어서 소유의 독점이 없는 것이며 보여주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없는 것이다. 즉 보여주는 대상으로서의 객체와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주체가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연극은 관념, 혹은 그 어떤 추상적인 개념들의 구체적 물질화를 통해 이루어 지지만 그 결과물은 자본주의 양식의 대표성을 띤 상품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지배적인 분위기, 그 자체이다. 연극의 물질화는 상품의 생산-그리하여 거래되는-이 아니라 하나의 가시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관객과 행위자가 따로 떨어져 소외되어 있는 관계가 아니라 그 둘의 관계과 전면적으로 재조정되 그 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구분이 되지 않으면서 공동의 참여가 존재할 뿐이며 그 속에서 전체로서의 ‘나’를 구현하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로서의 나! 그것이 바로 ‘우리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우리 것’에서-애당초 인간은 자연과 동일한 상태로 존재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에 따로 기술하리라-‘내 것, 네 것’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자연과 친화(親化)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일정한 거리(距離)가 생성되면서 시작된다. 그러한 거리 생성의 주범은 인간을 인간 이외의 대상물과 분리하여 그것의 우위에 두려고 하는 특정한 관념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모든 것의 차별화를 선언했던 원시 이후의 생활에서 비롯된다. 물론 그러한 변화는 인류역사 발전의 일반화된 과정이었으며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던 강력한 인식의 변화였다. 그 변화의 이면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미학이 인간의 의식을 점령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구체적 사실이 도사리고 있던 것이다. 또한 산업화, 기계화를 동반한 합리화의 과정은 이러한 변화의 근저에서 수많은 기호와 이미지를 만들어 냈으며 단지 파편으로서의 조합적 기능 이외에 사물과 인간 사이의 어떠한 근본적인 결합도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세계는 다시 원점(최초의 출발지)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재차 인식의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수없이 펼쳐져 있는 파토스(pathos)의 혼란 속에서 ‘나’를 찾는 유일한 희망이다. ‘나’라는 것은 하나의 점으로서의 개체가 아니며 모든 것과의 동일화가 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나’이어야 한다. 우리는 ‘나’로부터 인간의 자연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부자연이 거세되는 시점이요, 출발점인 것이다. ‘나’의 내부에는 대우주로서의 관통선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새로운 시공간이 제한적인 차원의 벽을 뚫고 새롭게 시공간을 구획하는 것이다. 연극은 수많은 동굴을 가진 거대한 산이다. 그많은 동굴 속에는 결국 같은 목적을 갖고 다르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주관의 불을 피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거대한 산,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차별화한 모든 것과 차별화 되지 않으려는 열망, 그곳으로부터 연극이 시작되어야 하며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우리 것’이 되기 위한 최초의 전제이다. 변화는 단지 이탈하려는 경향이며 하나의 속성으로서 도사리고 있는 몸의 태도일 뿐이다. ‘우리 것’은 변화하되 공간의 다양한 변형만이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의 정지속에서 운동이 발생되는 것이다. 즉, 운동은 시간의 생성이라는 이차원적인 사고패턴에서 진공상태에서의 시간의 소멸이라는 복합적 구조체계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때 몸의 시간이 새롭게 만들어지며 그것은 몸이 새롭게 인식하는 시간이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이기(利己)상태에서 벗어나 ‘모두 함께’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의 분신으로 부활될 것이다. 이때의 ‘나’가 비로써 ‘우리 것’이라는 이상적(理想的) 실체의 기본 토대인 것이다.

  연극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연극이 우리에게 보내는 눈빛은 항상 매섭기만 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우리는 연극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전체적 양상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것’을 들춰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연극의 역사는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노력의 역사이다. 자연과 멀어지려는 거리생성으로부터, 거리의 제거라는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땀의 역사이다. 연극사적(演劇史的)으로 볼 때 연극의 기원에 관한 이제까지의 다양한 논의는 크게 두가지로 압축시켜 볼 수 있다. 인간의 기원의식(祈願儀式)에 뿌리를 둔 주술(呪術)이라는 형태가 놀이와 제의(祭儀)의 연계성을 통해 일반화 되어 나타났다는 설(說)과 아리스토틀(Aristotle)이 얘기하는 것처럼, 사람과 사물과 그것의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줄거워하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창조적 모방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연극기원에 대한 접근방식이 존재하고 실로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 왔지만 결국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연극이라는 형태는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 볼 수 있으며 그것의 기원에 대한 논의도 그것이 생성.변화된 바로 그곳에서부터 탄생의 당위성과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많은 연극기원설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애당초 연극은 하나의 집단적 현상이었고 한 집단이나 조직의 전체적인 행사였다라는 점이다. 즉 연극이 제의로써 행사되어졌건 불가해(不可解)하고 신비스런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인간의 본능적 심성을 나타내었건 간에 소수의 정예요원들이-보통 엑소시스트(exorcist)나 천재로 묘사되는-누구로부터-아마도 신(神)을 의미하는데-임무를 부여 받아 실행하는 소규모의 제한적인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 모두가 자기를 드러내고 각자가 몸으로 느껴 자발적으로 행하는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현상으로서의 대규모의 축제였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것’이라는 주제의 표준 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이른 그러니까 인류가 최초로 지구라는 혹성에 두 발을 디디고 선 바로 그 시점, 거기에 모든 것과 동일화되어 있는 완전한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가지려고 할 필요도 없었고 A는 A, B는 B라는 형식논리의 태동이전에 자신이 곧 자연이고 사고물로서의 대상과 하나이니 신이라는 존재 또한 나의 내부에서 살아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연극을 잘 만들어야 겠다는 고민도 그에 따른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타임머쉰을 타고 그곳으로 가볼 수도 없는 일이고 다만 자기의 내부속으로 천착해 들어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인간 내부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나’라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현재의 ‘나’라는 다소 조잡한 존재형식에 아직까지 연결되어 있는 생명선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극에 있어서의 ‘우리 것’을 찾아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요, 열쇠인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동일화의 세계로부터 차별화의 과정으로 이행되는 연극사적 근거를 무엇으로부터 찾을 것인가. 역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계급국가의 출현은 예술에 있어서의 분화과정을 적극 진행시켰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일체화 되어 있었고 그렇게 인식되고 체화되어 있었던 원시 제종족들은 계급의 출현과 지배-피지배계급의 성립에 의해 그 어떤 개인에게 소유되어지는 연극을 탄생시켰으며 연극의 모자이크화, 혹은 파편화를 가속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앞서 행했던 권택무의 <조선민간극>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예술의 분화과정은 원시사회로부터 계급사회로의 이행과 그 나라 예술발전의 특수성과 관련되어 있다.” 즉 “조선의 원시 제종족들은 기원전 아득히 먼 태고시기부터 조선반도와 그 북쪽의 광활한 지대에서 살았다. 원시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그들 사이에는 점차 계급이 발생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계급국가가 출현하였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여.고구려.예.마한 인민이 즐긴 예술은 원시혼합예술의 성과를 계승하고 그 예술의 특징을 미쳐 다 가지지 못한 측면을 가지면서도 이미 원시혼합예술과는 구별되는 일련의 특징을 체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 예술이 혼합예술로부터 예술의 분화과정이 적극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혼합예술의 성격이 계급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분화되었다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의 통합체로서 연극이 독자적 성격의 예술 쟝르로 발전하게 되는 데에는 계급의 출현이라는 사회학적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브라질의 매우 실천적인 연극인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점을 명백히 이해하고 그의 연극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연극은 처음에는 옥외에서 노래하는 자유민들, 카니발, 축제와 같은 주신(酒神)을 찬미하는 노래였는데 후에 지배계급들이 연극을 손아귀에 넣고 다른 사람들-배우와 관객의 분리-사이를 분리하고 그 다음으로는 주역배우와 다른 배우들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이다. 마침내 강압적인 주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연극에 있어서의 관객의 입장을 단순한 구경꾼의 입장에서 제작자의 입장으로 돌려 놓고 그러한 방법론으로써, 억압당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해방되어 연극을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 연극 장치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계급사회의 출현, 그리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성립은 마침내 소유형태의 연극을 탄생시켰으며 이때부터 인간은 모든 사람의 공유형식이자 무한한 가능성의 매개물인 연극에 갖가지 자신만의 미적(美的)조건과 규범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과연 그러한 적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양 것과 한국 것, 미국 것과 독일 것…………그리고 내 것과 네 것, 결국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일반적 카테고리(category)를 연극이해의 기본적인 전제로 인식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특수한 것이라는 말의 정의(定意)는, ‘나’를 혹은 ‘자기’를 실제의 대상들과 합치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미온적 상태에서가 아니라 동일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의 ‘나’ 혹은 ‘자기’ 로써 정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가정(假定),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가정은 그 논리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전제조건의 미비로 인하여 보편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이러한 오류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산업과 기술, 생활의 스피드화는 인간을 육체적 노동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그로부터 파생되는 정신쓰레기들은 모든 것을 통합된 전체로서 보려고 하는 드넓은 시야에서 미시적인 앵글(angle)속의 시각적 인간으로 대체해 버리고 말았으며 이것은 폭력의 미학이 탄생되면서 제국의 정복사업으로 확대되어 나간 것이다. 이 때 ‘나’의 유한성은(인간은 유한성 속에서 무한성을 실현시켜 나가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이다) 정복으로 말미암아 유한속의 무한성을 억압당하고 끝내는 최초의 근원에 영영 이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20세기말의 우리 세계는 모든 것이 너무 확대되고 너무 다양.복잡해져서 끝없는 차별과 분리, 그리고 양상과 양상만이 살아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의 퇴보를 강력하게 진행시키며 따라서 체계의 몰락과정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계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억압의 체계에 의해 스스로 몰락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순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연극의 부활이며 우주의 순환원리로서의 기준인 원(圓)의 파괴에 맞서 진정한 ‘자기’ 찾기로부터 끊어진 원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고리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원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리고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은 전체적인 흐름속에서의 원의 파괴상태를 묵과하고 단순히 연극 순환양상의 외피만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연극의 역사는 순환의 역사이다. 그것은 창조의 역사이며 창조의 역사는 파괴의 역사이다. 그러나 파괴는 온전한 순환속에서-완전한 원의 형태 속에서-그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연극의 핵심은 새로운 연극언어, 혹은 새로운 연극문법-아르또(Antonin Artaud)가 이미 ‘공간의 시(詩)’ 라고 명명한-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그 총체적 국면의 다양성을 새롭게 통합시켜 나가는 데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위 예술엘리트들의 연극에 관한 자기편애, 자기 것화 하려는 경향과 연극 의미의 축소화가 방해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술엘리트들은 연극을 박물관의 박제화된 표본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들은 더욱 뛰어나고 더욱 훌륭한 더욱 값나가는 박제연극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걸작품의 생산이라는 개인 이기주의로 꽉 차있다. 대중들이 함께 하기에는 너무 부적합한 그래서 대중은 그들로부터 비난받을 수 밖에 없는 부르조아적인 나쁜 관습의 영향아래 고착화된 소유형식을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걸작품에 대한 믿음, 이것은 새로운 우상숭배이며 맹목적인 광기에 다름아니다. 이것은 사이비 종교집단의 열광과 동일한 것이며 연극을 하나의 형식적인 틀에 가두어 학대하는 양태이다.

  최고가 되기 위한 투쟁! 그것은 여러 층위의 소외양식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급기야 연극이라는 상품의 희소가치화와 더불어 연극과 연극 사이의 경쟁을 가치의 중심에 두게 되는 것이다. 종국에 경쟁의 미학은 피를 부르며 연극의 희소가치화가 진전되면서 연극은 존재의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연극은 피흘리는 것이 아니다. 피를 나누는 것이다. 연극은 바로 지금 여기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반(反)우리 것을 조장하는 우리 정신속의 미개의식을 제거하고 모든 유(類)의 철저한 개인적 토대위에 세워진 부실함과 결별하여야만 한다.

  ‘우리 것’ 이란 기본적으로 앞서 행했던 모든 불합리한 요소들의 거세를 통한 인식의 전환에 의해 그 일차적 목적지를 찾게 될 것이다.